nowhere, wonderland and worlding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 일어나는 ‘일’로서 세계만들기

                                                김은주

보르헤스가 인용하는 중국 백과사전과 거기에 제시된 분류법은 공간 없는 사유로, 의지할 데 없는 말과 범주로 이르지만, 이 말과 범주는 사실상 복잡한 모양, 뒤얽힌 길, 이상한 지형, 비밀통로, 뜻밖의 소통으로 넘치는 장엄한 공간에 기초를 두고 있다.1)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보르헤스의 ‘중국 백과사전’을 인용하며, 기존 분류 체계를 무너뜨리는 낯선 목록이 가져오는 충격을 설명한다. 푸코에 따르면, “황제에게 속한 동물, 방금 주전자를 깨뜨린 동물, 멀리서 벌처럼 보이는 동물…” 과도 같은 이러한 범주들은 논리적 체계가 아니라 사유의 기반을 해체하는 구조이며 “공통 장소의 붕괴”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2)이러한 장소의 붕괴와 균열로부터 헤테로토피아가 출현한다.

 헤테로토피아, 그것은 ‘다른(hetero) 장소(topia)’이다. 헤테로토피아는 이질적 공간이자 불연속적인 공간이다. 여기에 있으면서, 여기 옆에 놓여 있으면서, 다른 곳, 그 곳이 헤테로토피아이다. 푸코에게 헤테로토피아는 실재 장소이지만, 그 안에서는 주체가 완전히 안착하지 못한다. 그는 거울을 예로 드는데, 거울 속 공간은 실제처럼 보이나 실재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거울은 주체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한다. 또한 거울은 우리 세계의 옆에, 앞에 놓여 있어 거울이 세계를 ‘재현’ 한다고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사실상 거울에서 그 소실점, 혹은 깊이를 알 수는 없다. 거울은 실재와 환영, 안과 밖, 존재의 확인과 분열이 동시에 존재하는 장소이며, 바로 이 속성이 헤테로토피아의 핵심이다. “주어진 사회공간에서 발견되지만 다른 공간들과는 그 기능이 상이 하거나 심지어 정반대인 단독적 공간”3)인 “헤테로토피아는 불안을 야기”4)한다.

 이성은 작가는 익숙한 공간의 표면을 교묘히 비튼다. 그는 작품에 등장하는 욕실, 웨딩홀, 해변, 대기실, 폐허, 뗏목 등 다양한 장소에서 우리가 살아온 세계의 당연한 배치에 질문하며, 불안의 틈을 벌리어 헤테로토피아의 장소성을 구축한다. 그 장소는 실제 공간의 구조를 닮아 있으나, 닮음은 공간의 안정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은이 만들어낸 공간은 현실과 비현실의 층위가 끝없이 중첩되면서 세계의 경계선을 드러내는 균열의 긴장 위에 있다. 이 공간은 언제나 공간 속에 있고자 하는 자를 밖으로 밀어내는 동시에 포획한다.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체로 예상되거나 기대되는 바와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이 어긋남은 공간 속 인물의 어쩔 수 없는 행위 수행과 공간이 얽히어 변형되는 과정를 반복함에서 생겨난다. 다소 강박적이기도 한 반복이 일으키는 ‘일’과 있음은 노곤하고 고되나 이상하게도 희망의 기운을 풍기기도 한다.

 그것은 헤테로토피아가 완벽한 유토피아가 존재한다는 환상에서 멀어진 불안하고 분리된 장소이기에 개방성을 지니며, 정상성에서 멀어진 자들을 포괄하고 드러내면서 그로부터 정상성 바깥의 잠재성을 탐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리라. 그러하기에 이성은의 작업이 보여주는 헤테로토피아에서 일어나는 ‘일’은 실패이냐 재구축이냐인가는 질문 속에서도 미약하게라도 지속적인 세계만들기를 감각하게 한다.

- 반복하며 파열하는 헤테로토피아, 유동하는 해변과 바다
 이성은은 <Notion of being human>(2019)과 <갤러리로 돌아온 고추조각상 재고>(2020), 같은 해 <고추 조각상 한 점의 행방과 한끼 식사>, <경로이탈> 그리고 <The Drifters>(2022)까지는 정주한 공간의 질서를 문제 제기하며, 유랑하고자 하는 욕동을 드러낸다. 그 공간의 ‘문제’와 ‘구조’로부터 벗어남이라는 주제는 2023년 단채널 비디오 <Fall>에서 욕실이라는 가장 사적이면서도 패쇄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로 변모한다. 욕실에는 문도 환기구도 없다. 이 속에서 여성 인물은 강박적으로 청소라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청소는 공간을 통제하기 위한 태도처럼 보이나, 청소가 반복될수록 오히려 공간에는 더욱 불안감이 스며든다. 청소를 하는 행위는 공간과 맺는 관계를 흔들어 놓는다. 청소를 하면 할수록 공간에서 인물은 점점 더 위태로워진다. 반복은 위안이 아니라 균열을 증폭시키는 작용을 한다. 영상 후반부, 욕실이 물로 차며 디스토피아적 장면으로 전환될 때, 이 폐쇄된 공간에서 남성적 도시 건축이 상정하는 정돈, 관리, 위생의 담론을 철저히 수행할 수록 오히려 인물은 파국에 치닿는다. 물이 범람하면서 청소의 욕망은 이윽고 붕괴하며 기존 구조의 한계가 드러나는 틈이 생겨난다. 이 작품에서 욕실은 헤테로토피아로 작동한다. 욕실은 인물을 비추는 거울처럼 현실을 드러내고 그 현실이 사실상 허약한 기반 위에 있음을 제시한다. 청소를 수행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세계의 구조를 유지하려는 몸부림이지만, 반복이 거듭될수록 구조의 파열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제 욕실 공간은 더 이상 기능적 장소가 아닌, 세계가 해체되는 장면을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

 욕실에서 흘러간 물은 <Hydrogenesis>(2024)에서 유리 물방울이 되어 해변과 바다의 유동성과 맞닿은 <Floatage>(2024)에 도달한다. 이 작품은 육지와 바다 사이의 경계 공간인 해변 공간으로 나타난다.

 해변은 정주하는 육지와 유동하는 바다가 만나는 모호한 지점이다. 이 공간은 경계가 고정되지 않기에 일시적으로 머물기는 가능하나 완전히 정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떠나라고도 하지 않는다. 해변은 언제나 파도에 의해 모양이 바뀐다. 모래사구는 날씨와 조류 차에 따른 밀려드는 파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며 파도는 모양을 잡을 수 없다. 이 변화 그 자체가 바로 해변의 특징이다. 해변이라는 공간의 지형적 특성은 ‘영구성’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건축과 삶의 정서와 거리를 두고 유동적 공간에서 가능한 새로운 감각을 불러온다.

 여성은 해변가로 향하고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은 뗏목으로 안개가 자욱한 바다로 나아가려는 ‘일’을 한다. 이 항해는 고전적 탐험이 추구하는 목적지에 도달하여 그 곳을 점유하고 머무르려는 것이 아니라, 도착하지 않고 이동하는 존재를 지속하는 바에 관심을 둔다. <Floatage>는 방향은 있지만 목표가 없는 이동, 움직임 자체로 의미를 찾는 이동을 기록한다. 도착하지도, 머무르지도 않는 이동은 고전적 항해 서사가 전제했던 정복과 도달의 서사를 무너뜨리며 대안적 존재 방식과 다른 세계의 잠재성을 느끼게 한다.

 서로 다른 출신과 언어, 다른 장소성을 가진 두 작가가 공동으로 구성한 <Stove by a Whale>(2024)의 해변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가 지시하는 안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안에 있지 않은 공간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고래가 배가 충돌한 난파가 일어난 ‘일’을 증언하는 현장으로 해변을 조성한 이 작품이 구현하는 장면은 세계가 일어난 ‘일’의 폐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폐허에서 일어나는 ‘일’이 존재하는 세계가 존재함을 보이며,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일’하는 공생의 장소가 된다. <Floatage>영상에 등장하는 해변의 식물들은 비인간 존재들이 세계를 다시 엮어내는 흔적을 상징한다. 영상 앞에 있는 조형물 <Hydrogenesis>는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선 생태적 세계 만들기, 즉 다종적 공생의 조용한 증거물로 기능한다.

- 자리 없음과 미끄러짐의 장소
 2025년 작 <Wanderbound>는 결혼, 이주, 시민권이라는 국가와 제도가 설계한 경로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계속해서 그 자리를 잃고 미끄러지는 여성들의 서사를 진행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는 마주보는 두 화면이다. 두 여성은 서로의 세계를 지나지만, 서로를 볼 수 없다. 관람객은 두 화면을 동시에 바라보려 하지만, 끝내 어느 한 쪽에 더 많은 시선을 보내게 된다.

 작품 속 두 여성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리 잡기를 시도하지만, 이 시도는 매번 실패하고, 실패는 다시 새로운 시도를 반복하게 한다. 한 여성은 끝없는 대기실을 떠나 폐허의 웨딩홀에서 인공의 언덕을 쌓는 ‘일’을 한다. 다른 여성은 언덕 마을 아래의 지하 대기실에서 ‘열세 번째 존재’로 남는다. 자리를 얻은 듯 보이는 사람은 고립되어 있고 그가 쌓은 것은 사라지며, 자리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잠시 자리를 얻는 듯하나 곧장 그 자리는 사라진다. 사실상 이 공간에 그들의 자리는 없다. 그들이 있는 각각의 공간은 유토피아의 부재를 암시한다. 그들은 공간을 구축하고 머무르려고 반복적으로 행위하나 계속 실패한다. 이 실패는 다시 행위를 낳는 헤테로토피아로서 공간을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사라짐’, ‘자리 없음’은 결핍이 아니라 잠재성으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다른 곳에 있고 서로를 마주할 수 없으나, 벌인 ‘일’의 실패로 인한 ‘사라짐’,‘자리없음’을 통해 연결된다. 사라진 것, 자리 없음은 기존 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세계의 주변에서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여는 틈이며, 벌인 ‘일’의 실패는 또 다른 공간으로 미끌어져 맺는 관계를 상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자리 없음은 상처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일으키기 위해 일어나기 위해 비어 있는 자리와 장소를 마련한다. 자리를 갖지 못하는 상태와 실패하며 일어나는 ‘일’은 경로 탈주로 이어져 다른 관계, 다른 경로, 다른 세계 만들기를 위한 여지를 남긴다. 이는 이주자가 겪는 시간과 공간의 불안정성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며, 이와 동시에 질서의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만들어지는 세계를 펼치어 낸다.

- 세계만들기의 흔적
 이성은 작가의 보여주는 세계는 안정된 구조가 아니라, 균열과 이탈, 실패와 반복으로 일어나는 ‘일’로 구축되어 있다. 작품에서 펼쳐지는 공간은 현실과 환영, 내부와 외부, 정주와 이동이 동시에 나타나는 헤테로토피아적 장소이다. 작품은 그 틈에서 새로운 세계의 역량을 감지한다.

 이성은의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은 파국의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이 일어나는 ‘일’인 생성의 공간으로 작동한다. 그 공간은 어디에도 고정되지 않은 공간 ‘nowhere’이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벌어지는 장소로서 ‘wonderland’가 되기를 품는다. 이성은이 작업이 밀어온 방향은 바로 그 일어났던, 일어나는 ‘일’을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적 경험은 도나 해러웨이가 제시한 세계만들기와 맞닿는다. 해러웨이에게 세계 만들기는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들이 세계를 만들고, 어떤 세계가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여는가"5)라는 질문이다. 이러한 세계 만들기는 세계가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타자들과 얽힐 때 배우게 되는 느린 인내를 강조한다. 세계만들기는 완성된 목적지를 향하는 직선적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각기 다른 시간선들이 얽혀 있는 불확실한 지금을 최대치로 살아내는 것에서 생겨난다.

 이성은의 작업은 세계가 결코 단단하지 않으며, 우리가 의지해 온 공간과 그에 대한 애착의 느낌이 이미 오래전 부터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하기에 작품 속 인물들의 거듭하는 실패와 분투로 일어나는 ‘일’은 세계만들기의 흔적과 경로를 감각하게 한다.
 반복, 이동, 이탈, 자리 없음은 헤테로토피아적 틈을 열어젖히며, 기존 세계의 구조로는 포착될 수 없는 장소의 패임을 제시한다. 거기서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주하면서 헤테로토피아와 얽힌 우리의 장소성을 감각하고 세계만들기의 애씀을 감지하는 것이다.




1) 미셸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역, 민음사, 2012, 13쪽.
2) 위의 책, 9쪽.
3)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역, 문학과 지성사, 2014, 87쪽.
4) 푸코(2012), 11쪽.
5)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최유미 역, 마농지, 2021, 27쪽.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