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 개인전 < Survival Diary > 전시 서문_레인보우 큐브 갤러리, 서울


예술이 사회를 담는 법, 예술가가 사회를 사는 법
전영진
 예술가는 비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일까. 비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도,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도 종교인이 될 수 있듯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두가 바라고 열망하듯 예술의 가치는 비물질적인 것에 있어야 한다. 예술가를 통과하여 생산된 세계, 정신, 이상은 그것이 비록 물질적인 틀 속에 있다 하더라도 수치적 환산이 불가능한 가치를 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은 매우 잦게 수치적인 것에 의존하고, 특히 작품의 판매가 혹은 낙찰가를 작품의 가치와 대등한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것은 각기 다른 그림에 들어가는 노고나 시간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작가의 전시 경력이나 판매 기록, 이름값 등을 기반으로 정비례하지도 않는 크기에 의해 정해지는 ‘호당 가격’만큼이나 비 객관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숫자들은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객관적 지표로 자주 쓰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가볍고 흔하고 널리 사용되는 이 숫자가 여러모로 편리하지만, 많은 비물질적/형이상학적/정신적인 가치를 배제하게 하여 이상과 현실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작가를 쉽게 좌절하게 만들어버리게도 한다. 본인이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로 혹시 스스로가 무가치한 것을 생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작가 생활을 버티는 것이 힘든 이유는 비단 부족한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부족한 물질이 야기하는 정신적인 부분이 더 크다.
 이성은 작가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면면을 이를 발생시킨 산업화가 만들어 낸 여러 생산 방식과 디스플레이 형태를 이용하여 영민하게 표현한다. 비판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창작활동을 해 나가는 이러한 아이러니가 특히 그의 작업을 돋보이게 하는 지점이다. 예를 들어 고추 조각상에서 사용된 소제목 ‘재고(在庫)’는 실제로는 기업이 수요에 신속하게 응하기 위해 보유하고 있는 물품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판매되지 않아 공간만을 점유하고 있는 무가치한 재화로 인식된다. 마치 전시장에 나가지 못하고 작업실 한편에 쌓여 있는 작품처럼, 타의에 의해 의미를 가지기 전에는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의 퍼포먼스 안에서 판매되지 못한 이 재고들은 판매되지 못한 이유로 갤러리에서 설치/조각 작품이 된다. 관객은 같은 사물에 대해 달라지는 가치를 공간의 변화로 인지하게 되며 공산품과 작품의 차이, 대량생산과 유일무이한 것의 차이, 예술의 아우라가 만드는 농담 등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유쾌하지만 진지한 가치 전복의 방식은 그림이 그려진 종이의 무게를 달아 10원/gram의 가격으로 판매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 [초상화 프로젝트, 2020]와 설치 [왼쪽에서 오른쪽: 비싼 그림 순서대로],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불평등을 대표하는 문장을 저울을 이용해 현대적인 정물 사진으로 치환한 [정의의 현대적 정의]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일견 산업화의 공장형 대량생산 방식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 [Pawn Maker, 2020]는 정체성 확립과 자기 복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는 작가에 대한 비판적 시선, 작가의 손끝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것의 차이를 재고해 보는 ‘예술적 생산방식’에 대한 것으로 빗대어 해석할 수 있고, 결과적인 형태는, 체스판의 ‘졸’에 해당하는, 가장 흔하고 가장 잃기 쉽기에 가장 작은 가치를 가진 ‘pawn’이 지닌 의미와 예술가, 혹은 예술품을 빗대어 해석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작품이 만들어지고 이동되고 설치되기까지의 과정은 전시장에 완성된 장면이 가지는 힘을 가중시키며 이 모든 서사를 종합해야 그의 작품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다.
 행위예술의 대모로 불리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다큐멘터리 영화 [Marina Abramovic: The Artist Is Present, 2011]에서 그녀는 만리장성의 양 끝에서 걸어와 오랜 작업 파트너이자 연인인 울라이와 만난 후 헤어지는 퍼포먼스 [The Lovers, 1988]를 끝낸 후, 파리로 떠나 처음으로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샀으며 이는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예술가에 대한 관념적 이미지는 실제 예술가의 모습과 다소 차이가 있으며 지금은 이를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시대이며 예술가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때다. 또한 그녀는 재화로 교환이 불가능한 퍼포먼스를 자기 예술의 중심으로 두고 있지만, 퍼포먼스 작품에서 얻은 가치를 연출된 극적인 장면을 담은 화보 형식의 사진이라는 매체에 슬쩍 얹어 소비자에게 판매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수많은 수입을 얻는다. ‘가치 있는’ 퍼포먼스를 생산해 낸 ‘작가’로부터 생산된 모든 것은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 즉 지금 시대는 가치가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원금이나 지원금 같은 공공/사적 기금만으로 예술 활동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전과 다른 신선한 기획을 내놓아야 하며 그것을 평범한 생활인이기도 한 작가가 혼자 오롯이 이루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연유로 작가 활동 만으로 생계를 잇는 작가는 극히 드물다. 특히 시작하는 단계의 작가에게 그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가난을 예술가의 고정 값으로 두는 사회와, 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작가는 지금의 현실에 맞지 않다. 현대사회는 다재다능하여 순수예술 이외의 것도 제대로 해 나가는 인간으로서의 예술가를 요구한다. 그래서 당연하게 작품 판매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만이 성공한 예술가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가 사회에 쉽게 귀속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예술가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며 그것이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되기도 한다. 만약 어떤 작가가 생산해 낸 작품이 곧바로 환금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이 예술을 포기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면, 그 작가가 가진 태도는 자본주의 사회가 예술을 대하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사회 구성원이면서도, 사회로부터 소외된 것 같은 감정’, ‘곧 시작하는 단계의 작가로서의 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 중이다’, ‘노동이 생존의 수단이 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젊은 예술가인 나는 종종 실업자로 간주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생존의 문제 앞에서 예술가로서의 꿈을 계속 좇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는 작가의 자조는 차라리 꿈에 대한 미련 없이 노동자로 편히 살아가기를 갈망하는 [팔자 좋은 놈, 2019]이라는 로봇청소기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예술가를 떠난 예술의 결과물은 거대한 금전적 가치를 지닌 하나의 사물이 될 수 있지만, 세속적인 것은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그 과정 안에 놓인 예술가에게 체화되지 않아야 하고 오로지 대상화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부분이 이성은의 작업에 기대를 걸게 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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